텍스트힙 시대, 책이 밥도 먹여준다

AI로 영상을 만드는 시대에 구닥다리 책이 웬말이냐고 묻는다면 ‘텍스트가 힙한 시대이니 유행 따라가보자’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책 덕을 보며 먹고 사는데 응당 책 산업에 보은하는게 도리다. 책으로 무슨 덕을 봤는지, 어떻게 보은할지 고민하다 온갖 사연을 다 끌어왔다. 

바야흐로 몇십년전, 지금으로치면 ‘오디오북’이라고 해야할까? 동화구연 테이프를 하루종일 들었다. 인어공주나 신데렐라 이야기를 파도치는 소리, 마법을 부리면 나는 뾰로롱 소리와 함께 들으면 장면이 저절로 상상됐다. 책 보는 것도 취미가 붙기 시작하면서 읽는 능력은 생겼는데 ‘늑대의 유혹’, ‘몽실언니’, ‘가시고기’와 같은 소설만 읽었다.

그러니 정확히는 비문학을 읽지 않은 셈이다. 재밌는 문학이 이렇게나 많은데? 에세이? 인문? 사회? 아예 영문을 모르겠더라. 참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비문학을 더 많이 본다. 15년 전의 나는 아마도 상상도 못하고 있을 일이다. 소설을 영업하는 사람들이야 워낙 많으니 비문학을 영업해보고 싶어 꺼낸 이야기다. 날 먹여살리는건 비문학이니까. 그중에서도 인문사회, 과학 관련 책을 선호하는데… 목격한 순간 모자이크 독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취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름다운 제주서점 수집하기가 있었다

모자이크독서가 뭔데?

‘모자이크 독서’는 아주 작은 부분만 보더라도 독서로 인정되는 행위, 민음사 편집자가 만든 말이다. 소설을 모자이크 독서했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 못할 테지만 비문학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저자 소개만 봐도 되고, 해제만 봐도 세상이 다 이해해준다. 요즘은 사실의 수명’, ‘연루을 모자이크 독서하고 있다.

모자이크독서 단계를 지나면 ‘먹여살림’단계가 온다. 문학은 상상을 기반으로 다른 이의 인생을 살아보는 경험이라면, 비문학은 주제 하나를 잡고 써내려가는 작가의 태도와 삶에 좀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사실의 수명’은 논픽션을 써내려가는 작가와 편집자 간 치열한 팩트체크를 다룬 책이다. 사실 몇 페이지 읽다가 책에 마이크가 붙은 것마냥 귀가 울리는 느낌이라 잠시 멈췄다. 편집자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과연 나는 ‘사실’에 얼마나 근거한 글을 쓰고 있는지 점검해보게 된다.(‘연루됨’은 아직 제목만 모자이크 독서 했다)

카카오같이가치라는 모금플랫폼에 글을 써야 했던 나는 비문학 책들로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달에 두 번 모금함을 올려야했는데, 매번 주제가 바뀌었다. 5.18광주항쟁, 범죄피해, 간호사인권, 공익제보, 동물권 등 처음 접하는 사회이슈를 모금함으로 담아내자니 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모금함을 운영한 8개월 간 책을 통해 압축적으로 공부했고 그 때 쌓아둔 이야기들을 밑바탕 삼아 지금까지 공익 콘텐츠를 제작해오고 있다.

책 ‘사실의수명’, 작가가 쓴 문장은 가운데 네모박스 부분이다. 편집자 팩트체크가 작가가 쓴 문장을 에워싸고 있다.

물론 업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책의 순기능은 말해 무엇하나. 최진영 작가는 책 읽는 행위가 가장 적극적인 행위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가장 무기력한 순간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마음 상태를 점검해보면서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게 됐다. 이 더운 여름, 유리컵에 얼음 부딪히는 소리 들으면서 책 한 권 읽다보면 숨통이 트일거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책과 나 둘 뿐인 곳으로 잠시 도피해보면 알 수 있다.

친구야, 책 친구 있니?

앗, 그렇다고 책 읽는게 마냥 재밌고 신이나고 그렇진 않다. 잠이 쏟아지고 눕고 싶어지는게 당연지사 아닐까. 그래서 친구를 들여야 한다.

1) 인간 친구

인간 책 친구가 꼭 필요하다. 혼자 책 읽으면 50%만 읽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게 재밌었고, 어떤 문장이 좋았는지 나누고 싶다. 인간 친구는 독서모임에서 얻었다. 마음이 괴로워서 친구들끼리 책 읽고 만나서 입이라도 털자고 ‘OO 힘드니까 떠드는 모임’을 만들었다. 앞 두 글자는 욕이라서 쓸 수가 없다.

독서모임이 아니면 밖에 나갈 일이 없던 취준생 시절이라 어떻게든 지친 마음을 이끌고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 이 모임이 있었기에 세상 밖으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서로 사는 곳도 인생 주기가 달라지면서 아쉽지만 모임을 종료했다.

어두운 시절을 밝혀준 ‘존힘떠’ 독서모임

한동안 쉬던 독서모임을 재개한 건 2024년 10월이다. 독서초보라는 모임에 한달에 한번 나간다. 벌써 9번이나 참석했다. 독서모임에는 어느정도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발제문이 너무나 좋아서 꾸준히 나가고 있다. 지난 6월 모임은 책 ‘Jazz it up’을 읽으며 재즈의 역사에 대해 함께 살펴봤다. 각자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낭만적인 여름밤이었다.

(왼쪽) ‘독초’ 신년회, 서로 읽은 책을 가져와서 랜덤뽑기했다. (오른쪽) 마니또가 선물해준 시

얼마전 동료가 사내모임으로 열었던 ‘밑줄긋기클럽’에도 참여했다. 서로 책을 바꿔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 밑줄을 긋는지 공유해봤다. 밑줄이 겹칠 때는 공감이 되어서 신기했고, 겹치지 않을 때는 서로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어 좋았다. 텍스트힙 

(위) 밑줄긋기클럽 (아래) 밑줄긋기클럽에서 돌려읽은 책

2) 트렌드 친구

텍스트힙이 유행인 지금, 서울국제도서전는 트렌드의 백미라고 해야겠다. 책을 주제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달까? 출판사들이 책만 늘어놓는 것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 해 출판사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맞춰 굿즈를 만들고, 부스를 꾸리고, 업무분장하고, 계산에 응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재미없는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한산했던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

2025 국제도서전, 7년전과 비교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인파다

2018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발 디딜 틈이 없더라. 이번 도서전에서 가장 재밌었던 건 현암사 80주년 기념 ‘팔순잔치’와 책 ‘전국불효자랑’이었다. 현암사는 대표님으로 보이는 분이 한복입고 함께 사진찍으려 대기 중이셨는데 어떻게 대표님까지 설득해낸 걸까. 박수를 쳐드리고 싶었다.

현암사 팔순잔치, 한복입은 분이 대표님!

책 ‘전국불효자랑’은 불효자가 된 자식들의 이야기인데, 마냥 위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웃픈 사연들이 가득했거든요… 책을 사면 주는 콩가루가 백미. 콩가루같은 집안이라서 언제까지 울기만 할 거냐는 그 기세, 하지만 우리들은 고소하게 자라겠다는 위트가 담백해서 좋았다.

전국불효자랑, 책을 사면 콩가루를 주는 파격기획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의 경우 사전예매가 너무 많다며 현장예매를 받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이 외에도 공공성에 대한 지적 역시 타당하다고 생각하니 한 번쯤 읽어보시길.

3) 비밀스러운 친구

요즘은 책도 옷을 입는다. 대중교통에서 뭐읽는지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책을 보호하고 싶을 때 쏙 껴서 사용하는 북커버다. 사진의 북커버는 수수진 작가님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파란마음 북커버’ 갖고 싶었던 마음을 읽은 동료가 생일선물로 쓱 건네준 최고의 선물!

동료가 선물로 준 파란마음북커버, 책을 지켜줘

4) 나침반친구

‘도대체 어디까지 읽었더라…’ 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나침반, 책갈피다. 책갈피가 너무 많지만 최애 책갈피 두개를 소개한다. 왼쪽 책갈피는 부직포 재질의 나무 책갈피다. 속초의 동아서점에서 산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외에는 어떤 정보도 없다. ‘책 안 읽고 뭐하냐’는 표정이 깜찍해서 좋다. 

오른쪽 책갈피는 ‘Joo Young Kim’ 작가님의 ‘읽는 계절’ 책갈피다. 책갈피 잔치에 다녀온 동료가 사준 최애 책갈피라 비닐도 뜯지 않았다. 선풍기 앞에서 땀흘리며 책을 읽는 모습이 최애다. 

책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5) 밑줄친구

밑줄을 긋고 뭔가를 쓸 수 있는건 교과서뿐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책에 쓴다. 펜을 쓰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 같아서 주로 연필을 사용하고 있다. 밑줄긋기에 최적화된 최애연필은 LYRA의 FERBY다. 쥐기 좋은 삼각모양인데다 밑줄은 눕혀서 긋고, 세워서는 글씨를 쓸 수 있다. 텍스트힙

책 ‘대온실 수리보고서’

한때 품절되기도 했던 포인트오브뷰의 투명 색연필도 좋다. 기존 색연필보다 경도를 높혀서 밑줄을 그어도 티가 잘 나지 않지만 흔적은 남길 수 있다. 노란색, 민트색이 특히 문장을 빛내준다. 텍스트힙

박스째 가지고 다녀서 때가 묻어간다

6) 다른 친구가 필요하다면?

취미를 붙이고 싶다면 출판사별로 운영하는 독서클럽에 참여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해당 출판사의 책뿐만 아니라 직접 기획한 별도 콘텐츠도 만나볼 수 있다. 참여하고 있는 민음북클럽에서는 잡동산이라는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이번에는 읽기/쓰기/짓기책으로 구분되어 있다. 학습지처럼 하나씩 해보는 재미가 있다. 텍스트힙

민음북클럽에서 보내준 ‘잡동산이’

여기까지 쓰니 텍스트를 한 줄이라도 읽지 않으면 가시돋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다. 사실 책을 제대로, 다시 읽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좋아했던 전공수업에서 매주 1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던 시절도 물론 있었다. 당시 교수님은 ‘너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책을 요약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얼마전 교수님을 뵙고 늦은 답을 드렸다. ‘그때 하신 말이 어떤 의미인지 30대가 넘어서 알았다’고.

책을 읽기 시작한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 어떤 책을 읽어도 괜찮다. 다만 스크롤을 내렸다면 읽고 싶다는 마음이 1g이라도 있다는 뜻이니 지금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제목이 끌리는 어떤 책을 눌러보자. 그게 내 운명의 책이 될 지도 모른다. 텍스트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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